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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음식

부산 맥주 여행 (2일차)

 

부산 모모스 커피 본점

 

크로와상과 오늘의 핸드드립, 케냐 티리리카 눈두 AA


전날 옆사람은 바리스타를 꿈꿨다. 그날 술집에 온 이유는 유명 커피 브랜드의 인턴에 합격한 기념이라고. 주변에 모모스커피의 본점이 있다고 해서, 다음날 아침에 갔다. 먹어보고 싶은 디저트가 많아서 전날 이걸 놓친 게 후회된다. 뭐 그때는 피곤했어서 그냥 숙소로 들어갔었겠지만. 그녀가 추천한 오늘의 핸드드립 커피를 마셨다. 이전부터 오늘의 커피는 무슨 기준으로 정하는지가 궁금해서 그녀에게 물어봤다. 디가싱(degasing) 된 커피를 내어주는 것이란다. 커피는 굉장히 오래 걸렸다. 한 20분 기다린 것 같다. 핸드드립이랑 에스프레소 차이를 찾아보고 마셨는데, 눈 가리고 마시면 일반적인 차라고 할 정도로 부드럽다. 에스프레소 기반 커피의 거친 맛이 없다. 향..? 처음엔 오~? 했는데 마시다 보니 그저 그렇다. 이상하게도 맥주는 분석이 돼도 커피는 그렇지가 않다. 내 후각의 한계인가? 커피는 흥미를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더라.

 

이에 대해서 나중에 생각해봤는데, 그건 재능을 이긴 노력의 영향인 것 같다. 원래 뭘 마시거나 먹고서 맛과 향을 디테일하게 느낄 수 없는 후각과 미각을 지녔는데, 하도 맥주를 마셔서 후천적으로 학습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학습한 맛이라는 게 보통의 맥주에서 많이 느껴지는 몰트와 홉, 과일, 곡물, 부즈의 여부, 꽃, 향신료, 바디감 등이어서 이정도까지는 판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흔히 마셔보지 않은 와일드 비어들에서 느껴지는 노트들은 잘 구별하지 못하며, 따라서 야생 효모를 썼다거나 그런 환경에서 발효한 맥주 등은 마셔도 별 감흥이 없다. 같은 이유로, 잘 마시지 않는 위스키나 와인은 마셔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더라. 맥주가 아닌 술에서는 칵테일에서 기주를 구별하거나, 버번을 맛있게 먹는 정도 밖에 하지 못한다. 나는 소믈리에 되기엔 글렀다. 혹시 모른다. 개중에도 나같이 노오력으로 재능을 이긴 사람이 있을지도. 와인을 산지, 품종 등등 각종 특성별로 마시고, 테이스팅 노트와 재료를 본 뒤 이를 통째로 학습하는 것이다. 

중고등학생 때 영어 교육도 그렇게 받는 친구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교육 영어가 그러한데 (공교육도 마찬가지다) 영어 지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암기한다. 그냥 하는 게 아니라 문장을 구, 단어 단위로 쪼개고 문법적, 구조적 성분을 분석한다. 그렇게 하면 영어를 정말 잘 읽긴 한다. 정말 영어에 대한, 언어에 대한 재능이 없으면 그렇게 해서 영어 성적을 올릴 수 있다. 다만 이는 읽기 영역으로 한정되고, 얻은 영어 능력은 나머지 영역으로는 확장하지 못한다. 마치 내가 맥주는 분석할 줄 알아도 와인, 커피는 못하는 것처럼. 또한 창의성도 결여된다. 이런 학습 방법이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니다. 분명 이런 영어 학습 방식은 학생의 재능, 지능 여부에 상관 없이 99% 확률로 영어 독해 능력에선 먹힌다. 모두를 재능 없는 이들로 간주하고 이 교육을 획일화 하는 것이 문제다. 하기사 옛날엔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지 싶다. 재능, 창의성 있는 소수를 키워 인력의 질을 높일 것이냐, 평균적인 사람 여럿을 99% 확률로 적당한 능력을 소유하게 만들어 인력의 양을 늘릴 것이냐 하는 고민을 했을 것. 지금은 그래도 사회가 좀 발전했지 않나. 홍상수의 영화가 떠오른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카페라떼랑 레어 치즈케이크

어제 못 왔기도 하고, 치즈 케이크에 끌렸기도 하고. 레어하다니 얼마나 희귀하길래? 확실히 하얀 치즈케이크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성분에 크림치즈가 있길래 끌렸는데 먹어보니 그 맛이 느껴지진 않고 밑에는 라임파이이다. 에끌레어 먹을 걸~ 난 이후 한시간을 버스를 타고 툼브로이로 향할 것이다.

툼브로이

 

헬레스 / 헬레스 / ABV 4.8% / 툼브로이

 

이번 여행의 최대 기대주인 툼브로이이다. 두 시 오픈인데 좀 많이 일찍 왔다. 일하시는 분이 일찍 열어주셔서 다행. 2층이 식사하는 곳이고 1층이 테이크아웃하는 곳이다. 그리고 양조 공간은 둘 다 쓰고 있다. 2층에는 창문이 있어서 양조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최고의 맥주 경험이다. 헬레스는 내가 기대했던 만큼 몰트의 맛이 살아있다.

 

로겐 / 로겐 / ABV 4.4% / 툼브로이 

 

호밀로 만든 맥주라고 한다. 색이 탁하다. 신기하게도 위에가 밝고 밑에는 어둡다. 층이 진 맥주. 처음에 독일 뽕 차고 양조장도 보이고 해서 호기롭게 헬레스 한잔으로 시작했는데, 속이 좀 무겁다. 샘플러를 시킬 걸 그랬다. 바이스도 마시고 싶고 도펠복도 마시고 싶은데! 이거랑 도펠복만 마셔야겠다. 헬레스가 고소고소라면 로겐은 구수구수하다. 한국말의 재밌는 점,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글자 모양에도 반영이 되어 있다.

 

브랏부어스트


로겐은 처음 몇 모금은 이상하리만치 맛이 안 났다. 이게 뭐지 싶었는데 아차 물을 안 마셨구나. 그리고 나의 속이 좀 무거운 느낌. 오늘 아침에 커피 두잔이랑 빵 두개 먹었는데? 어제의 일은 다 잊은 거 아니였니 나의 위야? 여튼 그래서 컨디션이 좀 안 좋나보다 했는데 음식이 나오고나서 완전히 좋아졌다. 아! 역시 먹어야 산다. 그리고 올해 목표를 세웠다. 나는 독일인이 될 것이다. 어쩌면 난 독일에서 태어날 운명이었던 걸지도. 로겐은 가면 갈 수록 맛있다. 목구멍에서 호밀 맛이 응축되어서 묵직하게 느껴졌다가 이내 사라진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하며 감탄한 맥주였다.

브랏부어스트는 내 점심이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소시지 안에 들어있는 향신료가 잘 느껴지고 육질도 단단하게 꽉 차있었다. 이런 우아한 소시지에 케챱은, 내가 느끼기엔 범죄다.

2층엔 나 혼자 밖에 없다. 주문도 셀프 오더링이라 (태블릿 설치도 아니고 진짜 포스기를 만져서 주문하는) 직원을 볼 일도 없다. 물은 있더라. 흥미로운 방식이었다. 음식을 가져오신 직원 분께 코스터를 가져가도 되냐고 하자 그렇다고 하였고 나는 소심하게 두 개를 챙겼다. 일전에 뮌헨의 호프브로이를 갔을 때 하나 챙긴 게 아직 집에 있고 유용하게 쓰고 있는데 잘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 독일 여행이었는데 바로 뮌헨으로 가버린 나와 내 친구는 정말이지… 그땐 미쳐있었다.

 

바이스 / 바이스 / ABV 4.7% / 툼브로이

 

바이젠은 독일 북부지역에서 부르는 명칭이고, 남부에선 바이스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는 그게 그건 줄 알았는데 이런 디테일한 차이가 있었구나. 바이스를 주문하고 다시 앉아서 먹는데 소시지 마지막 한 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이윽고 바이스가 도착해서 마시는데 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바이스 맛이다. 솔직히 파울라너나 바이엔슈테판 같은 한국 수입되는 독일식 밀맥주 탭보다 맛있다. 그들이 오리지널이지만 산지직송의 힘은 못 이긴다. 은은한 바나나향과 잘 발효된 식빵의 향이 꽃처럼 피어나는데, 이거 국내에 이길 자가 없다. 이전에도 그링고에서 툼브로이 맥주를 마셔보고 그냥 그랬는데 역시 오길 잘했다. 독일은 멀리 있지 않았다.


도펠복 / 도펠복 / ABV 9.0% / 툼브로이


적고 보니 특이한 것이, 이곳 툼브로이의 맥주들은 이름이 딱히 없다. 그냥 스타일. 뭔가 독일의 클래식한 스타일을 보여주겠다는 자신감인 건가, 아니면 다른 철학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복비어는 한모금 마시고 말로 할 수 있는 설명을 포기했다. 그것이 가능했더라면 나는 지금 직업을 바꿔야 했을 것. 건포도 등의 건과일 향이 옅게 무대를 장식하고, 그 중앙에서 토스팅 된 몰트의 군집이 단체로 춤을 추는 듯 하다. 몰트의 공연이 한바탕 끝나고 나면 벨벳 같던 포도와 초콜렛 향들은 천천히, 하룻밤의 꿈이었다는 듯 떠나버리는, 멀리 떠나버리는 맥주, <블루벨벳> 같은 맥주이다.

 

툼브로이에서는 뒷좌석에서 아저씨들을 만났다. 둘은 호형호제하는 친구 같았다. 아마 한 명이 선배인 듯 하다. 샘플러를 서빙하면서 직원 분이 알트 비어를 추천하고 갔는데, 샘플러를 다 드시고 나서, 아까 그 '라거와 흑맥주 중간 어쩌고 하던 맥주가 뭐였지~?' 하시더라. 그걸 못 참고 알트 비어라고 알려드렸다. 거기서 말이 터서 대화하다가 인연이 생겼다. 다 먹고 이제 고릴라브루어리 해운대점에 가려는데 아저씨들이 차에 타고 계셨다. 마침 해운대에 가신다고 하셔서 얻어 타고 왔다. 술 드신 거 아니냐고 했는데 한 분은 안 드셨다더라.

 

 

고릴라브루잉 해운대점

 

 

여기서 3, 4, 5, 6을 샘플러로 주문했다. 사진에서도 좌측부터 3~6이다. 3번이야 워낙 유명한 맥주라서 '역시 자네야~'하고 마셨다. 그래도 독특하기 보다는 교과서적인 맥주다.

 

기대한 건 사실 4, 5번이었다. 근데 4, 5는 별로인 기억이 난다. 4번은 사워한 게 약했다. 심술인가 싶은데, 나는 신 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근데 가끔씩 가다 사워맥주가 보이면 '오랜만에 사워한 거나 마셔볼까~?' 하고 기대하며 시키는 편이다. 이때 엄청 사워하지 않으면 평가 절하한다. 극과 극이다. 사워맥주의 가격은 사워함의 정도에 비례한다. 얼마나 질 좋은 유산균을 얼마나 상태 좋게 오래 발효시키느냐에 따라서 사워함의 정도와 질이 달라진다. 그래서 정말 좋은 사워맥주들은 값이 엄청 나가더라.

 

5번은 기대는 안 했고, 직원한테 물어봤더니 쥬스같다고 해서 그냥 궁금해서 시켰는데 설명을 좀 더 자세히 읽을 걸 그랬다. '적당한 새콤달콤.'

 

6번이 좀 괜찮았다. 커피, 다크초콜렛이 강한 스탠다드한 스타우트는 오랜만에 마셔봐서 그럴 것이다. 요전에 스타우트가 끌려서 두 병을 업어왔는데, 일반적인 게 아니라 아주 끈적~한 스타우트가 끌렸어서 하나는 Toppling Goliat의 스모어 패스트리 스타우트이고, 하나는 Hardywood의 Kentucky Christmas Morning이라는 임페리얼 밀크 스타우트로 골랐다. 버번 배럴 에이지드였고, 진저, 바닐라, 꿀, 시나몬, 커피가 들어갔다. 6번 브리티시 스타우트는 사실 그냥 일반적이어서 좋았던 게 아니라 그 일반적인 것을 정말 잘했기 때문이다. 진짜 금메달감이다. 가끔 이렇게 브리티시 스타우트나 포터도 마셔줘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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