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2023.04.02 플레이스 EM
영화 모임에서 원작이 되는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읽은 사람들끼리 장소를 빌려서 같이 관람하였다. 그 전 주에는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모임이 열렸다고 했는데, 당시 지방에 있어 책을 못 빌렸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였다.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은 다음 이번 모임에 참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소설을 보고 영화를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책과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소설의 경우 인물의 독백과 구체적인 심리묘사가 가능하다. 그리고 러닝타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좀 더 디테일한 인물이나 배경 설정이 가능하다. 이것이 영화로 넘어오게 되면 상당 부분 제거되기 마련이다. 반면 소설은 작가의 의도대로 템포를 조절하기 어렵다. 작가가 상상하기를 빠른 장면을 느리게 읽는다거나, 느린 장면을 빨리 읽어버리면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읽는 것이다. 문장의 길이나 분량에 차이를 두더라도, 독자가 빠르거나 느리게 읽어버리면 끝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전달되는 지가 보장되지 않는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감독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템포를 강제할 수 있다. 소설에서 독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는 방법은 반복하거나 굵은 글씨로 표시하는 것 뿐인 반면 영화는 위에서 언급된 템포와 길이, 화면 구도나 포커싱 등의 방법이 있다. 이러한 차이점을 염두에 두고 둘을 비교하면 재미있는 감상이 가능하다.
남자는 반복되는 삶을 벗어나려는 인간 군상을 표현한다. 그는 선생이라고 하면서 곤충 채집을 다니다가 함정에 빠져 모래 퍼내는 노예로 전락하며 '모래 퍼내는 것쯤 훈련만 받으면 원숭이도 할 수 있다. 나는 좀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의무가 있다'고 절규한다. 사구 밖에서의 삶은 그럼 진취적인 삶이었을까? 묘사를 보면 그렇지 않다. 모래 안이나 밖이나, 사람들은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그 속에서 권태를 이겨내기 위해 추상적인 희망이라는 장치를 둔다. 희망은 믿음이자 종교이며,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잡으려 하면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희망은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있다. 끝없이 움직이기 위해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면 새로 만들기를 반복한다. 마치 시시포스의 형벌과 같다. 돌이 언덕에 오를 때까지 굴려가다, 꼭대기에 다다르면 떨어진다. 그리곤 다시 언덕을 향해 돌을 굴린다. 작품에서는 사구를 나가도 사구이고, 그 사구를 나가도 사구인,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삶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자신이 의미 없는 존재가 되는 것 같다는 불안감과 무언가 큰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어쩌면 거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뭔가 기대하는 바가 있었겠지만, 인간은 자연이 대의를 품고 낳은 존재가 아니다. 그저 우주에서 찰나의 순간에 태어나고 죽는 동물일 뿐이다.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야한다.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저서 <행복의 정복>에서 인간은 자기도취 때문에 불행해진다고 한다. 살아가는 데 있어 적절한 목표를 가지는 것은 삶에 재미를 줄 수 있고 끝에 가선 성취감을 느끼게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렇게 자아실현하는 것이 인간 최대의 욕구이다. 그러나 목표가 없다고 해서 나의 인생이 갑자기 평가절하되진 않는다. 애초에 그렇게 가치 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불행해할 필요가 없다. 목표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될 것이다. 목표는 없지만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인생이 아닐까. 인생은 형벌이 아니다. 누가 채찍질하는 것도 아니다.
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우울증과 무기력증, 자존감 하락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셋은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무기력해지면 자아가 어떻게든 편안함을 찾고 노력을 하지 않을 이유를 찾아 자기 위안을 하려는 것과 불안감을 느끼고 투쟁하려는 것의 두 양상으로 나뉘게 된다. 작품은 우울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남자는 투쟁하는 자아, 여자는 무기력한 자아를 의미한다. 무기력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둘은 매 순간 싸우게 된다. 여자가 남자를 완벽하게 제압해서 한동안 숨 쉬는 것조차 하기 싫어서, 맨정신을 거부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 남자가 반격을 노려서 무기력증에서 빠져나오기도 한다. 머릿속은 그들의 전쟁터가 돼버린다. 여자 측에서 사용하는 몇 가지 전략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번째 전략은 미루기이다. 사람이 끝도 없이 무기력해지면 깨어서 숨을 쉬는 것조차 하기 싫어진다. 그리고 그런 일상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지 않게 되고 점점 적응해간다. 이에 대해 기생충의 근세가 '나는 여기가 편하다. 여기서 태어난 것도 같다'라고 말한다. 현실에 적응하게 되면 그 기간이 끝도 없이 길어진다. 기존의 스트레스가 심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새로운 스트레스를 회피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조금이라도 갈 만한, 뭔가 해야한다는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무기력한 자아에게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기간이 길어질 수록 리스크와 불안감은 커진다. 그에 비례해서 숨기려는 자아의 힘도 강해진다. 사구의 깊이가, 감옥의 벽이 높아진다. 어딘가에서 본 글에서, 인간이 영원한 삶을 얻게 되면 생길 수 있는 부작용 중에 미루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어차피 안 죽으니까 내일 해도 된다는 것이다. 영원할 것만 같은 이 편안함 속에서 여자는 회피 방법을 얻게 된다. 구석에 있던 남자가 어쩌다 한 번 발언권을 얻으면 '내일 해도 된다'고 만류하는 것이다. 소설의 끝에서 물에 관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일 알려도 된다고 하는 것 같이.
또 다른 기술은 신포도 전략이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며 모든 에너지를 다른 이들을 깎아내리고 혐오하는 것에 쏟는다. 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그들이 가진 것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쉽다. 이윽고 자신을 치켜세우기 시작한다. 의미 없는 것에 시간을 쏟는 우매한 대중들 사이에서 나는 순수한 목적과 의도를 가진 빛나는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딱히 노력할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 이 상태로도 완벽하고, 문제가 있는 것은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동화되는데, 영화에서 이를 기발한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영화에서 남자는 밖에 나가서 한참 바다를 바라보다가 다시 사구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는 사구에서 자신이 만든 물과 바닷물을 동일시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남자는 더이상 바깥을 궁금해하지 않고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구를 나가려는 노력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무기력한 자아는 이렇게 또 남자를 묶어둔다.
여자의 마지막 전략은 타인에의 구원 요청이다. 건강한 사람이 목표를 언젠가 이룬다는 희망으로 살아간다면, 무기력한 사람은 누군가가 도와주러 올 것이라고는 헛된 희망으로 살아간다. 우울한 사람도 이 상태가 마냥 편하고 좋지만은 않다. 그러니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러 올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 기다림이 1년, 2년이 된다. 무기력한 자아는 불안해하는 진취적인 자아에게 누군가가 온다는 식으로 가스라이팅을 한다. 작품에서 남자는 계속해서 여자에게 타인의 존재를 언급한다. 내가 밖에서 아는 사람이 있으니, 내가 사라지면 누군가가 나를 찾으러 올 것이라고. 그들은 7년 째 오지 않았다. '노루가 사냥군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빼내어 주면 그에게 기대서밖엔 살지 못한다. 그 사람이 부재중이거나 사라지면, 혹은 그 사람도 나의 영향을 받아 약해지면 그때는 다시 바닥을 기다가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남자는 정답을 알고 있다. 결국 여자에게 귀의했지만.
남자가 폭주하게 되면 만족하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다가 언젠가 번아웃이 와서 다시 주도권을 여자에게 넘긴다. 여자가 지배하면 무기력해진다. 이렇듯 자아가 극단적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사람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준다. 어떻게든 둘의 원만한 합의가 필요하다.
독서 모임에서 한 분이 사구의 사람들은 직장인이고 물은 월급이라는 해석을 했다. 남자가 일하지 않고 물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알아낸 것은 창업 아이디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리스크를 감당하기 싫어하고 일단 현재 적당한 돈이 따박따박 들어오니 편해서 시도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