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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죽어가는 영화를 사랑하며

내가 언제부터 영화를 영화로 받아들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영화를 영화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영화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괜찮은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매개체가 아닌

영화의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촬영부터 편집까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영화를 같이 볼 사람이 없어도 극장에 갈 수 있고 이후에 약속이 없어도 상관이 없다.

좋은 영화를 완전하게 볼 수 있는 포맷의 상영관이 먼 곳에 있어도 괜찮다.

극장에 간다는 것은 영화를 완벽하게 느끼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극장에서 봐야 완전히 집중할 수 있고 

완전히 집중하기 위해 극장에 가는 것이다.

극장에 가는 행위만으로도, 극장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정신이 영화에 빙의하게 만들 수 있다.

 

2015년에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라는 작품을 봤다.

SF의 영화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그땐 안방에서 작은 컴퓨터 스크린으로 봤었다.

아무런 설명도 이렇다 할 서사도 없는 내러티브와 미장센에 화를 냈던 것도 같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영화와 이를 만든 감독과 높은 평가를 주는 이들이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 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10주년으로 이 영화를 상영했었다.

대체 어떻게 이 소식을 알았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이 영화에 대한 어떤 반감와 오기 때문에 가기로 했던 것 같다.

이번엔 내가 이 영화를 도해하리라 마음 먹고 오로지 그 영화를 위해 길도 잘 모르는 초행길을 나선 것이다.

아무튼, 오딧세이는 CGV와 메가박스가 아닌 극장에서 본 첫 영화가 되었다.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았던 작품이라 자막을 옆에다 동시 영사를 해줬고, 때문에 자막을 세로로 읽었어야 했다.

이에 굉장히 신기해 했던 기억이 강렬히 남아있다.

국내 메이저 영화사에 비해 낙후되고 단차 없는 좌석이 매우 낯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문화에 대한 마음가짐은 '신경 쓰지 않음'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극장에서 본 그 영화는 이전 보다 큰 울림을 가져왔다.

원시인이 맞닥뜨린 모노리스와 광기에 가까운 대칭과 기하학적인 장면들,

침착하면서도 긴장감이 유지되는 서스펜스와 충격적인 엔딩들은

모두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고, 이상한 것은 감독이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나였다.

영화가 다른 것도, 내가 그 짧은 사이에 영화를 몇 천 편 본 것도 아니었다. 

바뀐 것은 영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장소 뿐이었다.

 

무엇이 나를 그 서울로 인도했는지 그 시작점은 모르지만

이 이후로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된 것만큼은 명확하다.

나는 그 두세 시간 남짓의 시간 여행을 사랑하게 됐다.

영화라는 것이 내 인생에서 의미를 가진 순간이었다.

 

당시 나는 고3이었고, 문화 생활을 하기 위해 서울에서 생활하고 싶었다.

그래서 잘해봐야 경기권이나 지방대이던 성적을 서울로 갈 수 있도록 올렸다.

그때 내 꿈은 내 대학 전공을 살려 성공하는 것이 아닌

대학교 수업으로 영화학 듣기였다.

첫 학기 때 바로 교양으로 영화 수업을 신청했고, 

첫 수업 때 1985~90년의 초기 영화를 보여줬을 때 흘린 눈물을 아직도 기억한다.

 

영화는 감정을 폭발시킨다.

영화는 시각과 청각을 자극시킬 수 있는 예술 작품으로

과거의 기억을 가져와 나머지 세 감각도 이끌어낼 수 있다.

영화는 실현하기 어려운 상상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소리와 영상과 문학의 집합체이며

관객을 다른 장소로, 다른 시간대로, 과거 혹은 미래로 보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래서 영화는 보는 환경에 따라 감상이 달라질 수 있다.

 

코미디 영화는 다른 사람과 같이 웃을 때 더 재밌다.

액션 영화도 히어로를 동경하는 팬들과 함께 할 때 더 장엄하다.

내가 영화를 보러 와서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면

영화는 더 재밌어지고 영화를 보고 더 풍부한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 마련된 공간에서 영화 안으로 들어가

영화가 자아내는 감정에 이입하도록 세팅된 음악과

내가 이입한 인물을 향해 들려오는 대사를 들으며

영화와 함께 숨쉬고 영화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체험은

집에서 편하게 아무 전자기기로 보며 쉽게 이룰 수 없다.

 

극장이 줄어드는 이유는 다양하다.

코로나도 한몫하지만, 사실 코로나 이전부터 극장은 죽어가고 있었다.

감독 혹은 제작자가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메시지를 억지로 심거나,

판에 박힌 안정적인 영화들은 이미 한껏 올라간 대중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충분치 않았다.

OTT 서비스들의 등장으로 극장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잃었고

숏폼의 성행으로 더 이상 사람들은 연속되는 두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문화의 수준은 문화를 즐기는 대중들이 결정한다.

창의적이고 높은 수준의 문화에 대한 수요가 있어야 제작자들도 이를 공급할 수 있다.

극장을 갈 필요가 없는 환경 속에서, 영화가 시간 죽이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영화가 10분 안으로 줄거리 요약되는 유튜브 컨텐츠로 사용되는 사회 속에서

제작자들은 더 이상 좋은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어질 것이며

그런 좋지 않은 영화들은 점점 더 쉽게 소비될 것이다.

이런 악순환은 영화의 소멸로 이어질 것이다.

 

영화는 등장 배우나, 서사 하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음악부터 미술, 연기,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중요한 종합 예술이다.

오늘도 관객을 감동시키고 자신이 상상한 세계를 체험시키기 위해

소리와 색감 하나하나 조절하는 영화계 종사자들이 존재한다.

영화는 수많은 일자리들을 생성해내며 엄연히 세계 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산업이다.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영화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고 새로운 기법들을 시도하는 예술가들도 많다.

그들 덕택에 영화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

영화의 길을 만들어 가는 그들을 위해

영화를 공부하고 영화로 먹고 사는 이들을 위해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영화는 영원해야 한다.

 

 

 

 

 

 

 

 

영화를 사랑하게 되는 영화를 몇 편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헤일 시저 (2016), 코엔 형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2017), 우에다 신이치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2019), 쿠엔틴 타란티노

시네마 천국 (1988), 주세페 토르나토레

탑 건: 매버릭 (2022), 조지프 코신스키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 (2000), 코엔 형제

펄프 픽션 (1994), 쿠엔틴 타란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