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은 참 순수했다. 내가 원하면 원하는 것이고, 싫어하면 싫어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마음도, 세상에 대한 시선도 내가 바라보는 대로 보는 순수하고 맑은 시절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경험과 지식이 늘어난다. 말도 마음도 이젠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없고 주변 환경과 맥락을 따져가며 때론 의심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된다. 안녕한지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안녕하냐고 물어본다. 어렸을 때는 반가워서 인사했다면 지금의 안녕하세요는 많은 목적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그러면 타락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고 나쁜 게 어디 있겠는가.
어렸을 때 유희왕 카드가 그렇게 소중했었다. 나는 동생과 사촌 동생에게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들을 항상 주면서 살았다. 당연히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른들이 봤을 때 그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형이 동생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대체 무엇이 모범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말을 하며 동생들에게 넘기기를 강요하였다. 나도 애였지만 나는 어른인 것을 강요 받으며 자랐다. 그들의 어린 시절에도 유희왕 카드 같은, 미노루와 이사무에게 TV같은, 사회 문제와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을 좇았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그 시절의 순수한 마음은 잊어버리고, 본인 생각하는 대로 살아간다.
어릴 때는 눈 앞에 보이는 놀이와 친구들 간의 유대감이 중요하다. 야구와 스모를 보기 위해 TV를 바라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하여 돌수세미를 먹거나 무리하게 방구를 뀌다가 바지에 실례를 한다. 어른들에게는 무엇을 위해 사는 지도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으면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사람 간의 관계에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떨 때는 행복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깔려있는 냉정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이를 잊고 살아가다가 언젠가 직시하게 되는 순간도 온다. 영화 속 중년에게는 정년이 그것이다.
영화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역사 속에서 살아가면서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아니 고립까지는 그렇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것을 여러 레이어의 플롯으로 보여준다. 어른들이 말이 낳는 오해, 오로지 관계 중심의 대화를 하는 부녀회원들, 본인도 아이였으면서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귀엽게만 보는 어른들, 자기는 어른이라 생각하지만 할머니에게는 투정만 부리는 아이인 어머니. 사실 사람을 갈라놓는 것은 세대고 성별이고 지역이 아니라, 그냥 사람은 다 달라서, 이해할 수 없다. 친구와도 형제와도 다르고 부모와도 다르다. 나를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안녕하세요'라는 말은 아이들 말처럼 그렇게 쓸데없는 말은 아니고 번역가의 말처럼 그런 다른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윤활제일 수도 있다.
현실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다가도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 한 번쯤은 되돌아 가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럴 순 없겠지만은, 그래도 노력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는가. 내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 없이 사람을 만나고 배려를 하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항상 사람 관계는 어렵다. 어쩌면 어렵지 않은 것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진중하게 살다가도 순수하게, 영화처럼 유머를 잃지 않는 것도 살아가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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