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1 압구정 CGV 아트2관
오디세이(odyssey)는 서사시라는 뜻이다. 정확히는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담은 대서사시의 제목으로, 현재는 일반 명사로서 '다양한 경험을 담은 모험담'이란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우주인 데이브가 목성으로 향하는 여정 - 나아가 인류의 시발점부터, 나아가야 할 끝없는 미래로의 여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교향곡을 표방하고 있다. 영상이 나오기 전에 암전 속에서 오케스트라가 조율하는 소리 같은 것이 몇 분이고 흘러나오며 영화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시작되는 음악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A to Z가 이 음악 속에 있다고 강렬하게 주장하는 듯 하다. 그리고 그게 결코 텍스트로 설명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내비친다. 유인원의 진화, 달, 탐사선, 목성의 4개의 막 구조와 조율음은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짐승과 인간을 구분 짓는 가장 큰 기준 중 하나는 '언어'의 유무이며, 인간에게 언어는 강력한 도구이다.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사과와 같은 것은 언어를 모르더라도 손이나 눈으로 가리키면서 그것에 관련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강아지도 자신이 산책을 가고 싶다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 눈짓으로 문이나 목줄을 가리키곤 한다. 그러나 사랑, 우정, 그리고 눈 앞의 고기가 아닌 보편적인 뜻의 고기와 같이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은 이렇게 물리적으로 다룰 수 없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언어'이다. 추상적인 개념은 마치 구름과 같아서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원하는 대로 제어할 수가 없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 일정한 형태를 띄는 상자이다. 무엇이든 상자에 넣게 되면 특정한 단위로 셈을 할 수도 있고 적재할 수도 있고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도 쉬워진다. 언어는 관념을 가두는 가스통과 같다.
인간은 언어로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도 있고 기호로 수리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지만 언어는 너무나도 강력하여 반대로 감옥으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인간들은 모든 관념을 상자에 담다보니 상자가 없으면 상상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즉 인간은 언어로 생각을 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에, 언어로 나타내지지 않는 것들은 생각하지 잘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어가 없다고 해서, 이름 붙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론 상자가 아닌 감옥이 되어버리는 언어를 나는 때때로 벗어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창의적인 상상과 자유로운 사유를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사 없는 음악과 텍스트 없는 영상, 그림들은 언어로부터의 독립 운동이다. 사람들은 이 운동에 동참함으로써 때때로 족쇄를 벗고 날아갈 수 있다. 장시간 족쇄를 차다보면 생기는 욕창을 예방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공포감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이며 인간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하는 필연적인 장치이다. 유인원들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날카로운 이빨도, 엄청난 근력도 없어 주변 짐승들에게 항상 위협을 느끼며 살아왔고 이를 둔기라는 인류 최초의 무기로 극복하였다. 농경을 시작하고 사회를 이루어 짐승들을 지배했지만 공포감은 대상을 바꿔가며 여전히 인류와 함께 했다. 위에서 물이 떨어져 토지를 비옥하게 만드는가 하면, 언제는 삶의 터전을 쓸어가버리기도 했다. 이런 무지가 해소되기도 전에 인간은 오만하게도 자신들의 의미와 위치를 궁금해 하고, 알 수 없는 대자연의 이치의 비밀을 풀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것에 비하면 약과였다. 인간들이 그렇게 알아낸 바에 따르면 태양은 지구를 돌고 있지 않고,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나아가, 우주의 시공간의 크기와 물리 법칙은 인간의 상상력을 아득하게 넘어선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명제와 공포의 최종장을 선사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우릴 버렸고, 사실 거둔 적도 없었다.'
이런 공포감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다. 구골, 구골플렉스, 무량대수로 별의 개수와 우주의 크기를 설명한다 한들,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는 파동방정식을 아무리 푼다 한들 그것들은 '기호'일 뿐이며 인간이 느끼는 허무감을 온전히 내포하지 못한다. 앞서 영화가 교향곡을 표방하고 있다고 하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스탠리 큐브릭은 이 영화를 영화로 쓰는 교향곡이길 원했다고 생각한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이 수천만명을 죽이고 인류 평생을 지구에 살다가 처음으로 우주에 발을 뻗는 시기에, 가 본 적 없는 미지의 장소에 대한 기대감과 인류 찬가, 과학과 우주에 대한 공포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관객들이 실제로 체험하게 하는 데에는 음악과 영화가 제격이었다. 극도로 사실적인 우주에 대한 묘사는 우주를 유영하는 기분을 들게 하며, 그렇게 쌓아온 분위기 때문에 에어록 장면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을 것이다. 그리고 데이브가 목성에서 창조자를 조우했을 때 차원을 넘나드는 자아를 목도하며 당연하게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표현돼서도 안 되는 감정을 느낄 것이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모놀리스(돌기둥)에 대한 의미도 살펴봐야 한다. 이에 모놀리스에 대한 개인적인, 혹은 상상일 수도 있는 해석을 첨부한다. 먼저 차원은 방향성의 개수라고 할 수 있다. 점은 갈 수 있는 방향이 없기 때문에 0차원이다. 선은 왼쪽 혹은 오른쪽이란 방향이 하나 있기 때문에 1차원이고, 면은 위/아래, 왼쪽/오른쪽의 두 개이기 때문에 2차원인 식이다. 단순히 이미지만 보자면 웅크린 유인원은 점, 0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슷하게 모놀리스를 만지기 위해, 뼈다귀를 소지하기 위해 일어선 유인원은 선, 1차원이다. 0과 1은 두 차원 간의 경계에 대한 환유이다. 따라서 모놀리스는 차원을 건너뛰게 하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0과 1은 3막의 우주선에서 다시 나타난다. HAL 9000이 그것인데, 이는 0과 1을 합쳐놓은 것 같은 디자인이며, 전체적으로 모놀리스와 비슷하게 생겼다. HAL은 0과 1로 모든 연산을 처리하는 컴퓨터를 대표하고, 거짓 모놀리스를 뜻한다. 또한 더 높은 차원인 2 이상을 보지 못하고 0과 1에서 머무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영화에서 HAL 9000은 결국 대항하는 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제거당한다. 이는 니체에 의하면 사자의 단계로, 기존의 것을 넘어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을 갈구하는 인간상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HAL 9000의 생김새에 대한 해석이 과하다고 생각된다면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보면 된다. 그것은 0(꺼짐)과 1(켜짐)을 합쳐놓은 로고이다.
진짜 모놀리스, 창조자는 거짓 모놀리스, 거짓 신을 죽이고 더 높은 차원으로의 도약을 선언한 데이브를 높게 사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데이브가 창조주를 만나러 가는 길에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레퀴엠이 들리고 무한한 빛깔들이 펼쳐진다. 이들은 규칙이 있는 듯 하면서도 없는 듯 한데, 우주는 혼돈 속에서 영겁의 시간을 걸쳐 형성된 질서 위에 생겼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 하다. 이내 인트로에서 들었던 조율음 같은 소리가 뒤에 들리기 시작한다. 다음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우주의 탄생과 물리 법칙을 추상적으로 보여준다. 빅뱅부터 시작해, 4개 기본 힘의 분리, 은하의 탄생과 우주가 점점 투명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듯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인간의 이성으론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을 일방적으로 주입 받은 데이브는 점점 미쳐간다. 창조자의 우주학 강의가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에 교수님이 등장한다. 이들은 창조자의 아바타 쯤 되는 것 같은데, n차원 정팔면체의 형태를 띄고 있다.
영상 참조 (5:40초부터)

정팔면체는 정다면체 중 하나로, 정다면체는 4, 6, 8, 12, 20의 다섯개만 존재한다. 정다면체는 이 때문에 역사 속에서 너무나도 완벽하고 신비로운, 우주의 조화를 보여주는 도형으로 취급을 받았다. 예로 플라톤은 이들을 각각 불, 흙, 공기, 물, 우주 전체의 모양이라고 생각했고, 태양계의 타원 궤도를 밝혀낸 요하네스 케플러는 이것이 수성부터 토성까지의 궤도를 나타낸다고 생각했었다. 영화에서 정팔면체가 나온 이유는 이것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정팔면체의 움직임이 이상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4차원 이상의 물체를 시각화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재 3차원의 공간에 살고 있고 영원히 2차원만 인식하면서 산다. (인간은 2차원의 사진을 연속해서 보면서 그나마 간접적으로 3차원을 인식한다.) 따라서 우리는 4차원부터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치만 3차원 세계에 사는 우리가 2차원을 인식하는 방법을 따라가면서 상상해볼 순 있다. 3차원에서 2차원인 면은 3차원의 입체를 이루는 일부 속성이다. 즉 4차원에선 3차원 공간 또한 4차원의 일부가 된다. 이를 어떻게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2차원으로 옮기면 저런 영상이 된다.

최소 4차원 이상에 있는 이 존재는 데이브에게 우주의 탄생과 행성의 생성에 대한 강의 뿐 아니라 쉴 곳까지 제공한다. 하지만 데이브가 창조자를 따라 온 곳은 무언가 다르다. 인간은 3차원 공간에 살고 1차원의 시간 속에 산다. 인간은 3차원의 공간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데이브는 이곳에서 미래의 자신을 볼 수 있고 미래의 데이브는 과거의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데이브가 도달한 방은 다양한 시간대의 데이브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며 이곳은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 시간 마저도 최소 2차원 이상인 곳이다. 창조자의 강의는 따라서 크게 다차원 공간과 다차원 시간으로 나눌 수 있다. 1부 강의를 들으며 데이브는 점점 동공이 확장되고 미쳐가다가 2부 강의에선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모든 수업을 마친 데이브는 초월한 인간, 아기가 되어 지구로 돌아간다.
영화는 우주에의 공포를 다루고 있지만 우리 인간은 점점 더 의식을 확장하고 진화해왔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500만년 전 유인원이 도구를 들었고, 지금은 지구 궤도를 정복하며 미래엔 화성까지 가는 꿈을 꾸고 있다. 감각 기관과 뇌와 같은 신체적인 한계 때문에 장엄한 우주를 이해하고 우주의 모든 곳에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 상상과 차원을 무시하는 도전 정신이 있는 한 인간은 무한한 존재이며 물리적인 제약은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신은 죽었다'라며 말하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왔고 믿어왔던 대자연의 비상식적인 이치를 창조한 신은 없으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허무감과 공포심을 큐브릭은 좀 더 낙관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니체와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다른 결론을 내는 큐브릭은 사실 우주가 인류를 의미를 부여하고 낳았다거나 인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존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인내심, 저항 정신,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라고 말한다.
사람은 추상적인 개념을 쉽게 다루기 위해 언어를 발명했다. 하지만 그 언어를 통해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언어가 없더라도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다. 가령, 기호를 이용하는 수학과 과학이 발전해서 사회가 바뀌어 인간은 더 상위의 의식을 지니게 됐다. 이렇게 언어와 기호는 의식을 확장하는 발판이 되고 이를 딛고 올라가다 보면 신에게 가까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영화가 영상이 아닌 대사로 진행되었더라면 나는 의식을 확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영상으로만 가득한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여러 생각을 한다는 것부터가 인류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우주에 비해 인간은 당연히 한 없이 보잘 것 없는 존재지만, 인간의 고결한 의식으로 우주를 향유할 수 있다. 우주가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면, 내가 스스로 부여하면 된다. 나는 비록 땅에 있지만 내 이성은 모든 곳에 있다고 말하며 좀 더 희망찬 미래를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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