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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음식

부산 맥주 여행 (1일차)

 

부산 (맥주) 여행에 관한 글이다. 긴 연휴가 운 좋게 생겨서, 어딜 여행할까 찾아보다가 부산이 대중교통도 잘 돼있고 브루어리도 몰려있어서 여행하기 딱 좋다는 말을 듣고 가게 되었다. 1박 2일 동안 맥주만 마셨다. 이 글엔 그 중 첫날에 먹고 마신 것들, 그리고 사람과 만나 나눈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이 맥주여서 카테고리도 술, 음식이다.

 

비어샵

 

루벤

 

파스트라미 버거이다. 비어샵은 파스트라미 버거로 유명하고 다양한 맥주 바틀과 캔을 판매한다고 해서 방문하였다. 버거 종류는 '루벤'과 '클래식'이 있는데, 클래식은 너무 짜다는 설명에 이걸 시켰다. 뒤에 있는 건 다음에 설명할 전포 라거.

 

 

전포 라거 / 라거 / ABV 4.7% / 고릴라 브루어리


부산 와서 첫 맥주이다. 항상 첫 맥주는 기본적인 라거로 시작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는 것인가. 라거는 에일보다 후발주자이지만 요즘 시대의 맥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그들의 에일을 마시겠지만 이제는 전세계가 라거로 시작된다. 맥주 여행의 첫 맥주라서, 너무 기대된 나머지 사진 찍는 것을 까먹었다. 굉장히 크리미한 탑을 가졌으며 크리스피하며 깔끔하게 마무리 된다. 첫 맥주로 완벽한 선택이었다. 이는 비단 내가 라거를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후에 맥파이 쾰시도 마셨다. 카펠 쾰른인 줄 알고 시켰는데 맥파이 것이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로는, 쾰시 맥주는 꼭 독일의 쾰른에서 만들어야 하고 인증까지 마쳐야 쾰시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당연히 국내에 종종 들어오는 가펠 것인 줄 알았는데 맥파이 것이라 좀 놀랐다. 맥파이 공식 사이트에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건 어떻게 만든 걸까? 

 

칠캣 / 콜드 IPA / ABV 6.5% / 와일드캣 브루어리


와일드캣 브루어리가 비어샵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17시 오픈이었고, 저녁엔 컬러드를 가야 해서 못 갔다. IPA 중 내가 그다지 쥬시하지 않고 (열대과일을 싫어하는 편) 호피한 것을 좋아한다 했더니 사장님이 추천해 주신 칠캣. 먹자마자 사장님께 이게 내가 좋아하는 IPA라고 답했드렸다. 비어샵 사장님이 마셔보고 바로 들여오고 싶어했단다.

 

런던 프라이드 / 잉글리시 비터 / ABV 4.7% / 풀러스


참새는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한다. 영국의 추억의 맛 런던 프라이드. 냉장고에 사장님이 영국 맥주가 그리워서 직접 만드셨다는 펍 에일이 있었다. 사장님 양조도 하시냐고 여쭤보니까 고릴라 창업자시란다. 후덜덜한 스펙. 한국에 비터가 잘 안 팔리긴 하다. 미국이며 스웨덴이며 각종 노란물 깜장물 별 게 다 들어오는데 잉글리시 트래디셔널은 잘 없다. 비어샵에서 괜찮아 보이는 맥주를 많이 사왔다. 오미자 세종, 사장님의 에일, 수도킹, 고스트, 레드벨벳 케이크 맥주. 이 중 맥파이가 두 개다. 요즘 난 맥파이 맥주가 괜찮은 것 같다. 언젠가 제주도를 가면 맥파이를 방문해야지 싶다. 가서 쾰시는 어떻게 한 거냐고 물어봐야겠다.

솔탭하우스 서면

 

트레비어 바이젠 / 바이젠 / ABV 4.5% / 트레비어

 

근처에 Slice of Life 라는 괜찮은 피자집이 있다고 했다. 나는 피자엔 항상 바이젠을 먹는다고 했는데 사장님은 역시 영국사람인지 비터를 마신다고 했다. 부산은 특이한 게, 근처에 브루어리가 많아서 대충 어딜 가도 저런 맥주들을 파나 싶다. 피자는 있던 거 그냥 데워준 거라 그냥저냥이었고, 맥주는 바나나향과 밀이 꽉 찬 게 아주 맛있었다. 바이젠은 정말 잘 만들면 어떨 땐 죽을 먹는 것 같다.

 

컬러드

 

컬러드는 위스키 바 같은 비주얼을 가졌다. 피아노도 있었는데, 나는 피아노 접은 지가 꽤 돼서 쳐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장전에일 / 잉글리시 비터 / ABV 3.8% / 컬러드, 와일드웨이브 합작


컬러드에서 장전에일이 유명하다 해서 마셔봤다. 근데 향이 좀 약하다. 5번째 배치이고, 지금 6번 배치가 캔으로 납품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비터알못인가 싶기도 한데, 병으로 마신 런던 프라이드보다 별로다. 아무튼 장전은 컬러드의 동네 이름이다. 장전 하니까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이전에 회사 동기랑 이야기하다가, 내가 뜬금 없이 '권리 장전'의 장전이 load와 의미가 같냐는 질문을 던졌다. 여태 나는 '권리 장전'을 뭔가 어딘가 벽에 걸어놓거나 기억해서 다짐한다는, 정신을 무장한다는, 그래서 권력에 저항하고 투쟁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왔다. 갑자기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궁금증에 내가 질문 던지고서 내가 인터넷에 찾아봤다. '권리 장전'은 章典, 글 장에 법 전 자, 법을 적은 글 내지 문서라는 뜻이더라. 친구는 사실 load의 의미로써 써도 된다고 했다. 왜냐면 총은 최고의 대화 수단이라서, 들이밀면 누구나 권리를 보장해줄 것이기 때문이란다. 어째 맥주 사진 걸어놓고 맥주 얘기보다 헛소리가 길다. 

 

Don't Look Back In Anger / 잉글리시 비터 / ABV 5.5% / 컬러드


장전에일의 강화판이라고 해서 마셔봤다. 확실히 강화된 것이 맞다. 도수도 5도. 아까 건 드링커블한 에일이어서 좀 약했나 보다. 이게 내가 아는 진짜 잉글리시 비터. 옆 사람이 맥주를 와인 마실 때처럼 흔들길래, 나는 처음 보는 음용 방식이라서 물어봤다. 나는 와인 마실 때는 잔을 섞지만, 맥주는 탄산이 빠질까봐 그러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보니 향도 확실히 강해지고 -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 일시적으로 거품도 올라와서 더 크리미하게 마실 수 있다. 긴가민가할 때 시도해 보면 좋은 방식이겠다.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그는 최근인지 그날인지 졸업했다고 한다. 사장님은 그에게 술을 선물했다. 

 

네메시스 / 와일드 고제 / ABV 6.2% / 컬러드


고제 맥주이다. '갈증나거나 식전주로 너무나 잘 어울리는 시큼짭짤한 맥주. 이것이 이온 맥주?'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인상을 찌뿌리게 하면서 끝엔 산뜻하게 기분 좋아지는 맥주. 입에 좀 남아있는 찝찝함이 있지만 대가 없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같이 시킨 버튼 머쉬룸 튀김도 맛있었다. 시키고 나서 화장실 갔다왔더니 메뉴가 나와있었는데, 앉아서 먹으려니까 조리 담당 직원이 다시 와서 요리에 대해 설명해줬다. 난 이런 전문적인 CS에 항상 감동을 받는다. 이게 기본값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일 쉽지가 않다. 

 

Double Citra Daydream / DDH DIPA / ABV 8.5% / Equilibrium x Other Half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양조장이 만나 세계적으로 검증된 재료 - Citra를 사용하여 세계적으로 유행 중인 스타일을 만들었습니다.'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DDH DIPA는 Double Dry-Hopped Double IPA라는 뜻이다. 홉을 Double 했다는 건 아마 맥주를 끓일 때 홉을 두 번 넣는다는 뜻일 것이다. 홉 향은 고온에서 잘 날라가서 다 끓은 후에 넣는데, 이걸 끓는 중간에도 때려넣었나 보다. 그래서 홉을 두 번 넣은 뉴잉글랜드 스타일의 Double IPA가 완성되었다. 맥주는 굉장히 입체적이다. 밑에는 마치 잔디를 연상케 하는, 짙은 홉이 두껍게 깔려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빨갛고 노란 열대과일이 종류별로 쌓여있다. 마시면 노을이 진 하늘의 브라질을 보는 느낌이다. 나는 이걸 마시고 나서 잠시 인터미션을 가졌다. 13시부터 마신 술이 9잔이나 된다. 

 

문달레 / 얼 그레이 진 사워 스타일 에일 / ABV 5.0% / 컬러드


'문달레 얼그레이진 샤워에서 영감을 받은 향수같은 맥주'라고 한다. 마시기 전부터 얼그레이 향이 난다. 상큼한, 과하지 않은 사워 맛이 있다. 오히려 기대했던 것보다 덜 사워하다. 진 테이스트 보단 쑥향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름다운 시간은 / 배럴 에이지드 골든 스트롱 에일 / ABV 9.0% / 컬러드


이거는 마지막 맥주기도 하고 옆사람과 대화를 나누느라 세세하게 테이스팅을 하지 못했다. 벨지안 에일에 기대해서 무슨 배럴인지 물었는데 피노누아 와인 배럴이라고 했다. 앗, 실망...

나의 불쌍한 위장이 기나긴 맥주 여정에 파업을 선언해서, 잠시 인터미션을 가지기로 했다. 와서 보니 옆자리에 사람이 앉아있었다. 내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꽉 차진 않아서, 옆에 두 자리가 비어있었는데. 그녀는 흑맥주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메뉴에 갈매기 브루어리에서 나온 버번 배럴 에이지드 스타우트와 아이스크림 조합을 추천하는 부분이 기억이 나서 실제로도 괜찮은 지 물었다. 대부분 펍에서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도 좀 마셔보고 싶긴 했다. 선택지는 버번 배럴 에이지드냐, 컬러드에서 나온 와인 배럴 에이지드 벨지안 에일이냐. 갈매기는 고릴라브루잉 근처에 있다고 해서 내일 갈 수도 있으니까. 컬러드로 정했다.

꾸준함의 대단함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맛집 추천을 부탁하면서, 이전에 친구에게 추천 받은 부산역 근처 순대집을 물어봤는데 이곳은 꾸준하게 맛을 유지하는 곳이라고. 그녀가 생각했을 때 맛집이란, 엄청난 맛을 보유한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란다. 그녀는 꾸준함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가 뱃일을 하셔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이 없더라도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일을 나갔다고 한다. 그런 노력도 재능의 영역이라고. 그저 생각 없이 나가는 지경에 이르는 사람들을 존경한다고 했다. 문득 운동 나가다가 안 나가고 아침마다 요가하자고 해놓고 안 한 내가 부끄럽다. 누군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버지가 그런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는 그녀의 가치관을 형성했고, 그 가치관에서 비롯해 맛집의 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는 누군가를 존경해본 적이 있다. 나도 누군가에게 존경스러운 인물이 되고 싶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열등감을 받아들인다는 것. 받아들이니 편하다. 그녀는 어떤 친구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아나운서를 준비한다는 친구였는데 꽤나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학창시절부터 발표할 때면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말하는 게 남달랐다고. 내 예상이지만 그 친구는 많이 이뻤나 보다. 사실, 그녀도 꽤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마음은 끝이 없다. 나는 그녀가 서른초반이라고 했을 때 놀랐다. 다른 사람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외모를 가진 그 친구조차 안면비대칭이라는 컴플렉스가 있었다. 그 때문인 건지 운이 안 좋은 건지 몰라도 그녀는 아나운서가 되지 못했고, 꿈을 포기하고 결혼해서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고. 그녀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이거는 내가 경험해 본 것은 아니라 새롭긴 하다. 나는 운이 좋아서 별 노력 없이도 얻은 게 많으니까? 그리고 하면 되긴 했다. 그 이후에 그녀는 친구에게 연락해서 그동안 자신이 그 친구에게 열등감을 느껴왔고, 그 친구가 좋으면서도 싫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해졌다더라. 그 친구도 그녀의 열등감을 의식하지 못했단다. 남은 남한테 관심이 잘 없다. 내가 마음이 꿍해있는 건 사실 별 일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상기된다.

AI에 대한 대화도 나눴다. AI가 인간을 대체해버리면, 인간의 실수로부터 나오는 발명과 발전마저 없애버리는 거라고 했다. 이 생각은 못해봐서 재밌게 들었다. 사실 그녀는 말이 많은 편. 나는 맥주를 마시는 동안 듣기만 했다.

부산에 있는 친구들은 성인이 되면 부산에 남을 것인지 상경할 것인지 고민한다고 한다. 삶의 질은 부산이 더 좋단다. 문화생활도 좋고 인구밀도도 서울보다 낮아서. 그런데 일자리가 없다. 관광, 서비스, 배, 저기 밑에 있는 공장 아니면. 그래서 모두가 고민을 한다. 상경하는 것은 심적 안정감이 떨어지고 돈도 많이 든다. 그렇다고 부산에 남자니 일자리도 없고 어쩌다 구해도 연봉도 낮다. 버스요금은 국내에서 제일 비싸다는데 진짠가? 나는 어쩌고 보면 인생 정말 날로 먹는다고 생각이 드는 게, 동기들 중에 나만 수원 토박이. 이전 회사엔 기숙사가 있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에 잠깐 자취한 거 말고는 자취할 일이 없다. 내가 사는 지역에 큰 회사가 있다는 건 축복이구나. 서울 사는 사람은 물론 더 큰 축복. 서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이해 못하겠지. 생각해보니 내가 더 축복받은 사람인가? 나는 그 중간이라서 특혜 받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고 아닌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

 

 

이후 모듬회 소자를 포장해가서 숙소에서 느린마을 소주와 함께 먹었다. 저기 저 왼쪽에 비늘 붙어있는 회가 진짜 맛있었고 처음 먹어보는 밀치는 식감이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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